길걷기 카페의 관용 (시비1)
길걷기 카페의 관용 (시비1)
관용
알베르 카뮈의 말을 생각합니다.
“과거 허물을 단죄하지 않는 것은 미래 허물에 용기를 주는 것이다.
공화국 프랑스는 관용으로 세워지지 않았다.”
* 관용(寬容), 톨레랑스(Tolérance)
의견이 다를 때 논쟁은 하되
물리적 폭력에 호소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이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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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仁), 관용(toleration)
'어질다'라는 의미의 한자 '인(仁)'은 맹자가 인간의 기본윤리로 제시한 오상(五常), 즉 인, 의(義), 예(禮), 지(智), 신(信) 중에서 가장 으뜸으로 치는 것이다.
'인'이라는 한자는 두 가지의 짐을 진 사람의 모습을 형상화한 글자로, '남의 짐을 대신 지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의 근본적인 의미는 '이타적인 행위'이다.
인은 동양적인 관점에서 나온 단어이다. 따라서 영어나 그 뿌리가 되는 라틴 어에는 여기에 완벽하게 상응하는 단어가 없다.
흔히 우리가 '관용(寬容)'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Tolerance'나 'Generosity'라는 단어를 대신 사용하는데, Tolerance의 어원인 라틴 어 Tolerantia는 견디기 힘든 것을 참아 낸다는 '인내'의 의미가 강하고, Generosity의 어원인 Generōsus는 엉뚱하게도 '고귀한 출신'이라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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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와 소인
Generosity의 어원으로 보자면 관용의 의미는 고귀한 출신의 귀족들이 하찮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질적인 요소들을 너그럽게 받아 준다는 오만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고대 중국인들 역시 고대 로마 인들과 똑같은 관념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보통 '어진 사람'의 의미로 사용하는 '군자(君子)'는 사실 그 정의가 명확하지는 않다. 이 '군자'라는 단어가 공자 이전까지 단순히 귀족 계급을 의미하는 단어였기 때문이다. 군자는 주(周)나라 시절의 통치 계급을 지칭하는 말로, 문자 그대로 '왕의 사람들'이라는 뜻이었다.
중국 춘추 시대의 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는 《국어노어(國語魯語)》 상편에 보면 조귀(曹劌)의 "군자는 다스리기에 힘쓰고 소인(小人)은 노동에 힘쓴다."라는 말이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춘추 시대인 대략 기원전 5세기까지 '군자'는 통치하는 사람을, '소인'은 통치를 받는 사람을 의미했다.
공자 역시 춘추 시대의 사람이라 계급주의적인 관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어록인 《논어(論語)》를 통해서 '군자'의 개념을 추상화했다.
《논어》는 군자에서 시작해서 군자에서 끝난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에는 수십 가지의 군자와 소인 식별법이 수록되어 있는데, 공자가 말하는 군자가 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1.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화내지 않기(人不知而不慍 不易君子乎).
2. 언행에 신중하고 열심히 공부하기(不重則不威 學則不固).
3. 배부를 때까지 먹지 않기(食無求飽).
4. 편안한 곳에서 자지 않기(居無求安).
5. 열심히 일하면서 말 적게 하기(敏於事而愼於言).
6. 도를 찾아 바르게 수양하기(就有道而正焉).
7. 말에 앞서 행동하기(先行其言).
8. 행동을 좇아 말하기(而後從之).
9. 두루 사랑하고 편 가르지 않기(周而不比).
10. 포악하거나 태만하게 움직이지 않기(動容貌斯遠暴慢矣).
11. 표정을 바르게 하고 마음을 신실하게 먹기(正顔色斯近信矣).
12. 비속어나 나쁜 말 쓰지 않기(出辭氣斯遠鄙倍矣).
이 12개 항목은 논어의 처음부터 약 4분의 1 정도에서 빼낸 것이다. 논어 전체로 보자면 군자의 자격 조건은 끝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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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의 자격
우리가 춘추 시대 중국인들의 계급주의적인 사회관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어질다'라는 미덕에 대해서만은 무의식적으로 그들의 견해를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공자가 《논어》에서 제시한 '군자 되기'의 수십 가지 지침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고 하더라도, 그가 자신보다 나이가 어리거나 사회적인 권위가 월등하지 않을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어진 사람'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대신 '착한 사람'이나 '좋은 사람'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인' 혹은 '어질다'라는 미덕은 예나 지금이나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일방적으로 베푸는 것이지 동등한 조건에서 서로 주고받는 것이 아니다.
즉, 이 미덕은 그것을 베풀 정도의 사회적 위치에 있어야만 비로소 성립된다는 까다로운 조건을 가지고 있다.
이 미덕은 마치 현대판 신화의 하나인 미국의 대부호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의 이야기와 같다. 그는 20세기 초까지도 미국에서 가장 미움을 받는 사람이었다. 공무원을 매수하고 전문 스파이를 고용해서 외부에서는 경쟁사의 정보를 빼내고 내부에서는 노조 설립을 원천봉쇄했다.
은행에 자신의 회사를 파산시키겠다고 위협해서 더 많은 자금을 대출받았으며 필요한 경우에는 물리적인 폭력도 불사했다.
그가 마흔이 되기 전에 스탠더드 오일은 미국 석유 시장의 95퍼센트를 장악했고, 1882년에는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가 공식적으로 결성되었다. 불과 아홉 사람이 전 세계 석유의 90퍼센트 이상을 장악한 거대한 독점 조직이었지만 미국 정부는 여러 해 동안 이 트러스트의 존재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록펠러는 20세기 중반까지도 서구에서 근간으로 삼았던 자유방임적인 자본주의 체제에 최적화된 탐욕의 화신이었다. 그렇지만 반세기가 지난 지금 그에게는 'Philanthropist'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이 단어는 우리말로 '자선가'라는 의미도 되지만 '박애주의자'라는 의미도 된다.
그들이 베푸는 것은 'Charity'이다. 자선가가 베풀 때는 '자선'이 되지만 박애주의자가 베푸는 것은 '자비'라고 해야 한다. 사실 영어 자체가 지독히 자본주의적인 언어인지도 모른다.
고귀한 이타적인 사랑의 행위와 연말에 구세군 냄비에 집어넣는 푼돈을 동일한 단어로 사용하고 있지 않은가!
록펠러는 인생의 절반은 악착같이 돈을 벌기 위해서, 나머지 절반은 그 돈을 가치 있게 쓰기 위해서 산 사람이었다.
그의 재산은 1911년 약 9억 달러 정도였다. 지금의 화폐가치로 보면 그리 큰 액수가 아닌 것 같아도, 당시는 미국의 국민총생산이 1,000억 달러를 약간 넘어선 때였다.
단순하게 인플레이션을 감안해서 가장 낮게 잡아 현재의 가치로 환산해도 1,800억 달러가 넘는다.
록펠러는 1896년부터 회사 일에서 서서히 손을 떼기 시작했으며 58세인 1897년에는 완전히 은퇴했다.
그는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자선 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자선 활동도 사업 투자와 마찬가지로 과감하고 엄청난 규모로 이루어졌다.
그가 설립한 시카고 대학에만 1932년까지 8,000만 달러가 기부되었다. 그 결과 조그마한 단과대학이었던 이 학교는 미국 굴지의 명문대학으로 성장했다.
현대를 사는 사람들은 그에게 상당한 빚을 지고 있다. 그가 설립한 록펠러 의학 연구소(Rockefeller Institute of Medical Research)는 오늘날의 록펠러 대학으로, 모두 19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면서 인류에게 치명적인 갖가지 질병의 예방 및 치료 분야에서 경이로운 연구 성과를 올렸다.
1903년에 설립한 일반 교육 위원회(General Education Board)라는 재단은 인종, 성, 종교의 차별이 없는 평등한 교육을 목표로 하여 소외받던 미국 남부의 흑인들에게 고등교육의 기회를 확대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 재단이 현재의 록펠러 재단이다. 1937년 사망할 때 그의 재산은 2,600만 달러로 줄어 있었다.
시카고 대학교는 개교 15주년 행사에 그를 초청했다. 그가 기부를 해서 설립한 학교이지만 운영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가 첫 방문이었다. 학생들은 이 늙은 부호를 위해서 노래를 만들었다.
"존 D. 록펠러, 멋진 사람, 시카고 대학의 발전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모두 기부한 사람."
감격한 록펠러가 떨리는 목소리로 학생들에게 답했다.
"그 돈은 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이래서 인생은 끝까지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